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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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12일 음력 4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5-12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관사 4월 초하루 법문은 <마음 법문 이야기>, 마음 법문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문 중에 인과 법문과 마음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큰스님들 법문을 계속 들어보면 인과 법문이 제일 많고요, 인과 법문하고 똑같이 많은 법문이 마음 법문이에요. 대승불교 이전의 가르침은 인과의 가르침이고, 대승불교에서 이후는 마음의 가르침이거든요. 대승불교는 마음을 말하는 불교다.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법문의 명칭 心地法門 唯心法門 심지법문 유심법문一念子法門 一卷經法門일념자법문 일권경법문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 (雲水壇頌)(운수단송) 이 마음 법문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제일 많이 부르는 명칭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이에요. 마음 심자, 땅 지자. 마음은 땅과 같아서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 말이거든요. 땅은 비유고 마음은 당체인데, 해당되는 몸, 그 당체와 비유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 심지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절에 와서 심지법문한다고 해서 심지법문이, -저 시골 산중에서 호롱불을 켰는데, 그 호롱불 불붙는 게 심지거든요,- 그 호롱불 심지 얘기를 하나 그랬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마음 얘기에요. 마음은 땅과 같다. 그래서 마음과 비유를 동시에 얘기할 때 심지다. 이렇게 얘길 하고요. 마음 법문을 유심 법문(唯心法門)이라고 해요. 오직 유자, 마음 심자. 오직은 그것뿐이다 이 말이거든요. 마음뿐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유심불교다. 이렇게 말해요. 유심 법문이라고 그러고. 마음 법문을 일념자법문(一念子法門)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라는 일자, 생각 념자, 아들 자자인데, 이 생각이라는 것은 찰나염도 있고, 일념도 있는데, 찰나염이라는 것은 보면 보는 대로 생각이 일어나고, 들으면 듣는 대로 일어나고, 느끼면 느끼는 대로 일어나고 이게 찰나염이에요. 찰나 찰나, 순간 순간 생겼다 사라지는 그 염이 찰나염이에요. 일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이 다 일어나는데 항상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온갖 생각이 일어났었는데, 항상 일어나요. 그러면 그 항상한 생각은 일어나되 일어남이 없는 생각이에요. 사라지되 사라짐이 없는 생각, 그걸 한 생각이라고 그러는데요. 즐거웠던 마음은 금방 사라지는데, 그냥 또 생각이 그 밑에 바탕으로 있어요. 괴로웠던 마음도 사라지는데 사라지면서 그 바탕 속에 생각이 남아 있어요. 그 한 생각, 일념, 그 일념과 찰나염. 그래서 한 생각 법문이다. 한 생각에서 모든 것이 나오고. 한 생각은 그냥 한 생각이다. 그래서 그걸 성품 성자, 마음 심자를 써서 성심(性心)이라고 해요. 일념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일념자법문. 자(子)자는 남자, 여자하는 것처럼 어조사에요, 어조사. 모자, 탁자 이런 식으로. 그래 일념이건데, 거기다 어조사 자자를 붙여서 일념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일권경(一卷經)이라고, 한 권의 경이 있다. 그러면 한 권의 경은 뭐냐. 보통 세간경은 종이와 먹과 글자로 되어있는데, 지묵(紙墨), 묵자, 이게 세간경이거든요. 근데 일권경은 종이와 먹과 글자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일권경이 어디 있느냐. 나에게 있다, 이거에요, 나에게. 일체중생에게. 그래서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하니,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래서 전개는 무일자(展開無一字)라, 펼쳐서 설명하는 것은 한 글자도 없다. 그런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뿜어낸다. 서산스님 운수단게송(雲水壇頌)인데, 서산스님 이후에 법회 청법할 때마다 이걸 계속했어요. 법문이라는 게 이런 거고, 법문이라는 게 이런 거다. 일권경 법문이에요. 글자도 없고, 종이도 없고, 먹도 없는데 항상 대광명을 뿜어내고 있다. 이런 말씀이에요. 이게 마음 법문이지요. 그러면 이 마음 법문을 할 때 항상 외우는 경전 내용이 있는데요. 법문이라는 게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경전(經典)설법이에요. 경전설법. 경에 증거가 있는 설법이다. 그 경이라는 것이 표준이기 때문에, 법문을 할 때는 경전이나, 조사어록이나 증거를 가지고 해요. 어록증거, 조사어록의 증거. 경전증거. 이게 경증, 록(錄)증인데, 록에 증거가 있느냐. 이런 거죠. 그런데 이 마음 법문 할 때는 항상 증거로 표준을 삼는 내용이 대승기신론에 <소언법자 위중생심(所言法者,謂衆生心)>. 맨날 하는 거예요. 소언이라는 것은 말하는 바, 법이라는 것은, 위 말하자면, 중생심이다. 소언법자 위중생심.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데. 법이라는 것은 뭐냐. 법은 법계인데, 법의 세계. 십법계가 있다고 가르쳐요. 십법계. 십법계는 뭐냐. 육도중생법계. 중생대계가 육도라고. 육도중생이 있고. 사위현성법계, 현성, 성은 불보살이고, 현은 불보살 이전에 신심수행불자, 신행불자를 말하는데, 사위는 성문, 연각, 보살, 불, 이렇게 사위현성에다가, 육도중생을 합하면 십법계거든요. 이 십법계가 중생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소언법자는 위중생심이니,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시작하는 게 대승기신론이에요. 이게 딱 경전 증거죠. 경증. 이걸 유식한 말로 하면 전증(典證)이라고 해야 하는데, 경전이라는 책 전자하고 짊어질 증자, 전은 불전이라. 불전이란 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전정을 불전이라고 하거든요. 불전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게 법문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많이 얘기하는 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법문은 화엄경 야마궁중게찬품에 있는 게송인데, 일체라고 하면 역시 십법계를 얘기해요. 유심은 오직 마음. 조는 만들었다. 십법계를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 이게 일체유심조거든. 그다음에는 잘 안 말하는데, 화엄경 십지품 제6 현전지에 무슨 말씀이 있냐하면 삼계소유가, 욕계, 색계, 무색계 이건 중생세계를 말하는데, 온갖 중생세계에 있는 것이, 있는 바가 단지 일심이다. 다만, 다만이라는 것은 오직이란 말인데, 오직 한 마음이다. 일체 중생의 세계가 오직 한 마음이란 거예요. 삼계소유가 단시일심(三界所有但是一心)이라. 다만이라는 말이나 오직이라는 말이나 그것밖에 없다, 하나다라는 소리에요. 오직 한 마음이다. 이게 경증이지요. 유심법문. 경증. 그리고 또 많이 말하는 경전 증거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무일중생도 이불구유여래지혜라(無一衆生 而不具有如來智慧). 단이망상집착으로 이불증득이라(但以妄想執着 而不證得)>. 항상 외우는 대목인데, 무일중생, 없을 무, 한 일, 중생, 이불구유, 말 이을 리, 아니 불, 갖출 구, 있을 유. 여래지혜, 여래지혜를 한 중생도 갖추어 있지 아니함이 없으나, 중생중생마다 다 여래지혜를 갖추고 있다. 여래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중생은 한 중생도 없다. 그런 의미에요. 그런데 왜 모르느냐. 단이망상집착으로, 단지 망상집착으로 이불증득이라, 알지 못한다. 증득이란 안다는 말이죠. 알지 못한다. 이런 걸 큰 스님들이 보통 때 다 해요. 항상 읽고 항상 하고 그래요. 그러면 마음이라는 게 여래지혜도 있고, 망상집착도 있다 이 말인데, 여래는 화엄경에서 십신(十身)여래를 말하거든요. 열 십자, 몸 신자. 열 가지 여래가 있다. 거기에는 진여여래, 법성여래, 지혜여래, 신통여래, 자비여래, 복덕여래, 선정여래, 자성여래, 이 전체를 말하면 십신여래예요. 십불세계. 그게 여래인데, 그 여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혜를 다 여래지혜라고 해요. 중생중생마다 여래지혜를 다 가지고 있는데, 망상집착으로 모른다 말이에요. 이런 법문을 늘 하는 것이 마음 법문이에요. 마음의 緣起연기 無明六道衆生무명육도중생無明緣行 行緣識 識緣名色 名色緣六入 六入緣觸 觸 무명연행 행연식 식연명색 명색연륙입 육입연촉 촉緣受 受緣愛 愛緣取 取緣有 有緣生 生緣老死憂悲苦惱 연수 수연애 애연취 취연유 유연생 생연노사우비고뇌 그럼 이 마음 법문을 이렇게 할 때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마음의 세간연기, 마음의 불보살연기, 이렇게 설명을 하거든. 이 마음이 망상집착으로 나타날 때는 육도중생이 되는 거예요. 이걸 세간연기라고 해요. 그러면 세간연기에 근본 마음은 뭐냐. 무명심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간은 무명소현(無明所現)이다. 무명이 나타난 것이 세간법이다. 마음에는 망상 집착이 있어요. 망상집착을 간단히 말하면 무명이에요. 밝은 게 없다. 밝은 게 없다는 말은 못 보는 게 아니라 잘못 본다는 얘기죠. 못 보는 건 아니에요. 보긴 보는데 진실하고 다르게 보는 거예요. 진실하고 어떻게 다르게 보냐. 불그스름한 재료를 가지고 밧줄을 만들어서 마당에 놨는데, 어두컴컴할 때 어떤 사람이 불그스름하고 거무스름한 자료로 만든 밧줄을 보고 뱀으로 본 거예요, 뱀으로. 이것을 사승미혹(蛇繩迷惑)이라고 하는데, 뱀 사자, 줄 승자. 이 줄을,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본 거다. 밧줄은 거기 있어요.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밧줄을 밧줄로 본 게 아니라 뱀이 서려 있는 걸로 봤다 이거예요. 그런 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못 보는 게 아니라 잘못 본다 이거죠. 무명. 그래서 무명이 있으면 생로병사우비고뇌가 전부 무명에서 나와요. 꿈을 꾸면 꿈속에서 온갖 일이 다 펼쳐지듯이, 무명이 나타나면 무명으로부터 온갖 생로병사와 근심걱정이 생겨요. 그걸 무명연기라고 그럽니다. 연기는 인연으로 일어난다 이 말이죠. 무명연기. 그런데 신심을 일으켜서 청정함을 닦고 지혜를 점점 넓혀가면 무명연기에서 광명을 이뤄요, 광명. 그래서 제불은 광명이고 중생은 무명이다. 육도중생은 무명이요, 삼세제불은 광명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마음이 펼쳐지는 내용이에요. 그러면 이 무명에서 광명으로 나아갈 때 핵심이 뭐냐, 그게 신심인데. 신심이라는 것은 뭐냐. 이 망상집착, 무명, 또 업력, 호법자, 협력자, 망상, 집착과 무명, 업이 되풀이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 근본마음이 있고, 광명마음이 있다. 이걸 들으면 이걸 딱 믿고 그리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그리 돌아가면 그게 무명연기가 아니라 청정연기라고 해요. 그럼 청정연기는 어떻게 되냐. 그 한마음으로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걸 간단히 말하면, 돌이킬 반자가 있고, 비춰볼 조자가 있는데, 반조(返照)라고 하거든요, 반조. 반조가 있고. 돌아갈 귀자가 있고, 근원이라는 원자가 있는데 귀원(歸源)이라고 해요. 무명연기에서 청정연기로 돌아가는 분기점을 반조, 귀원. 귀원을 해야 돼요, 귀원. 돌아가야 돼요. 돌아가야 된다. 또 반조는 돌이켜봐야 돼요. 맨날 좋아하고 싫어하고 근심걱정하고 여기에서 이런 마음이 나온 것이 뭔가, 그 나온 것을 되돌려서 뒤로 돌아본다, 이게 반조거든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어떤 분은 의상본계론 그런 게 있는데, 돌이킬 귀자와 반자, 감정이란 정자를 써서 반정(返情)이라고 해요. 능엄경에서는 돌이킬 반자, 들을 문자, 반문(反聞)이라고 해요. 반문이란 뭐냐 하면, 소리를 듣는 그놈을 듣는 거예요. 됩되듣는다, 다시 듣는다, 됩되들어. 내가 귀로 소리를 듣잖아요. 그러면 보통 세간으로 듣는 것은 저 소리에 따라서 듣는데, 이걸 돌아가면서 듣는 것은 이 듣는 놈을 들어요. 이 듣는 놈이 소리가 있나 없나, 듣는 놈한테는 무슨 소리가 있나. 듣는 놈을 자꾸 듣는 거예요. 밖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듣는 놈을 돌이켜 듣는다. 이런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 무명의 망상집착이 없어요. 그래서 망에는 근원이 없다. 그냥 허망하게 들었을 뿐이에요. 그 밧줄을 뱀으로 봤는데, 뱀은 나온 데가 없어요. 허망하게 잘못 봤을 뿐이에요. 근원이 없어. 그런데 밧줄은 근원이 있거든. 그래서 듣는 놈은 근원이 있고, 밖으로 듣고 망상집착을 한 놈은 근원이 없다. 또 법문을 할 때 맨날 하시는 법문이 암실과 명등인데, 암실은, 깜깜한 방을 암실이라고 그러죠. 명등은 밝은 등불이란 말예요.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으니까 무섭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그랬는데, 등불을 딱 켜니까 어두움은 근원이 없어, 어두움은 등불을 켜는 순간에 싹 없어졌어요. 그리고 본래 그 방의 모습만 확 드러났다. 그래서 방의 모습이 확 드러나는 건 광명이고 어둠이 싹 없는 건 그건 무명이다. 그래서 망상집착을 걱정하지 말고 한마음을 돌아봐서 잘 챙기면 망상집착은 근원이 없어서 일시에 사라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삼세제불 광명심입니다. 일체중생은 무명심으로 살아가고 삼세제불은 광명심으로 나타난다. 무명에서 광명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게 그게 청정연기라고 그래요, 정연기. 光明諸佛出現 광명제불출현煩惱盡時 生死卽絶 生滅滅已 번뇌진시 생사즉절 생멸멸이寂照現前 應用無窮 名之爲佛 적조현전 응용무궁 명지위불(節要收錄 荷澤法語)(절요수록 하택법어) 법문이 많은 법문 중에, 번뇌가 다 하는데, 망상집착이 다 없어지는 때에 생사는 없다. 생사는 즉절하나니, 생사가 없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게 가장 문제인데, 죽고 사는 걸 번뇌소연으로 보는 게 불교에요. 죽고 사는 건 번뇌로 나타나는 거다. 이게 불교에요. 번뇌는 무명이다, 잘못 보는 거. 죽고 사는 것은 무명 미혹으로, -미혹도 역시 잘못 본다,- 느껴지는 거다. 왜 그러냐. 이 모든 중생과 사물이 생기는 거나 없어지는 거나 똑같은 하나의 진실법이에요. 생기는 것도 진실법이고 없어지는 것도 진실법이에요. 봄에 피는 저런 잎새도 계절이고, 가을에 지는 단풍도 계절이지. 봄에 피는 나뭇잎새만 진실이고 가을 단풍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진실이고 사라지는 것도 진실인데, 이걸 망상집착으로 태어나는 건 좋아하고 사라지는 건 싫어해요. 아무것도 안 사라지면 그런 법계가 어디 있나. 그런 건 없어요. 안 사라지면 큰일이에요. 그거참, 사라져야 새로워진다. 새로워짐이 있으면 사라짐이 있다. 이게 당연한 건데, 나고 죽는 걸 똑같이 즐거워하지 않고, 어떤 건 즐거워하고 어떤 건 괴로워해요. 이거는 무명이다. 잘못 보는 거다, 이거죠. 이 세상에 좋아하고 싫어할 거 없어요. 그게 진실이에요.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 어리석은 욕심이에요. 그러참,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게. 그래서 번뇌진시(煩惱盡時)에, 번뇌가 다할 때에, 생사가 즉절(生死卽絶)하나니, 생사가 곧 끊어지나니, 생멸이 멸이하고(生滅滅已), 나고 죽는 것이 다 없어지고, 나고 죽는 것이 하나의 진실법만 있고, 나고 죽는 것은 없다. 그리고 적조가 현전하면(寂照現前), 마음의 근본 바탕이 적조라고 그러는데,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고 막 찾아보면 그림자도 하나 없고, 티끌도 하나 없고 모습도 하나 없고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요. 이걸 적, 고요할 적자, 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마음이 큰 것이 오면 큰 걸 보고, 작은 것이 오면 작은 걸 보고,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있는 것도 보고, 없는 것도 보고, 모든 걸 다 봐요. 이걸 조, 비칠 조자, 라고 해요. 그래서 무명은 사라지고 적조가 현전이라, 현전이란 나타난다는 이 말인데, 나타날 현자, 앞 전자, 전자는 어조사고. 그냥 나타나요. 적적하고 명명한, 밝고 밝고, 적적명명, 이 고요하고 고요하고, 밝고 밝은 마음이 나타나면 이게 광명인데, 거기서 응용이 무궁(應用無窮)해요. 응용무궁. 거기서 무한 공덕이 나와요. 이 적조심에서. 그걸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명지위불이라(名之爲佛). 이건 강원에서 늘 배우는 절요라는 책이 있는데 그 절요에 수록한 하택 신회선사 법어예요. 적조가 현전하면 응용이 무궁이니 명지위불이라. 적적하고 맑고 맑은 마음이 나타나면 응용이 끝이 없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이런 게 마음이에요. 如來證涅槃 永斷於生死 여래증열반 영단어생사若有至心聽 常得無量樂 약유지심청 상득무량락(36권 열반경 제20권) 그리고 열반경에 보면 여래증열반(如來證涅槃)하니, 여래께서 열반을 얻으니, 생사에서 진실법을 얻는 거예요.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열반은 진실이라. 영단어생사(永斷於生死)라, 여래가 열반을 얻으니 생사가 영원히 없어졌다. 단, 끊어질 단자는 없어졌다는 소리예요. 생사는 없어요. 나고 죽는 건 없는 거예요. 오직 진실상이 있을 뿐이지 생사법은 없다. 무명에서 광명을 얻으면 모든 나고 죽는 모습이 전부 진실상 밖에 없다. 이거거든요. 영단어생사라, 영원히 생사가 없다. 약유지심청(若有至心聽)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상득무량락(常得無量樂)이라, 항상 한량없는 즐거움을 얻는다. 이런 법문인데, 열반경이라고 하는 경이 36권 열반경도 있고, 40권 열반경도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주로 보는 경은 36권 열반경이에요. 그래서 36권 열반경 제 20권에 수록된 거거든요. 그러면 열반이라는 게 생사가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곧게 해석할 수가 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상락아정도 열반이라고 그러지만, 열반에 4차원으로, 4원으로, 열반에 4원이 있다, 열반에 네가지 근원이 있다. 첫째는 원적(圓寂)열반이에요. 원적열반. 원자는 둥글 원자인데, 둥글다는 것은 무변이라, 끝이 없다 이 소리거든요. 끝없이 고요해요. 이게 원적이에요. 고요할 적자. 끝없이 형태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고. 이것을 원적열반이라고 해요. 원적열반. 그 다음에는 원명(圓明)열반. 둥글면서 또 밝아요.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원명해요. 끝없이 밝아요. 끝없이 고요해요. 세 번째는 원성(圓成)열반이라고, 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만히 다 이루어졌어요. 네 번째는 원만(圓滿)열반, 끝없이 가득히 차서 없는 게 없어요. 열반을 대승불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열반은 원적이다, 열반은 원명이다, 열반은 원성이다, 열반은 원만이다. 이런 구경열반(究竟涅槃)을 떡 증득하고 나면 생사는 없다. 그런데 이런 법문을 듣는 사람도 항상 한량없는 즐거움을 얻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열반경 게송이에요. 掬水月在水 弄花香满衣 (法演禪師語錄卷中)국수월재수 농화향만의 (법연선사어록권중) 그러면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조교(祖敎)와 경교(經敎), 조사의 가르침, 달마나 육조나 임제나 마조나 이런 선사들을 조사라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경에서 가르침을 경교라고 그래요. 조사의 가르침을 조교라고 하고. 조교과 경교. 그래서 항상 경교와 조교, 조교와 경교의 차이점이 뭐냐. 질문들을 많이 하는 게 동북아시아의 불교현상이에요. 조교, 경교. 그런데 조교와 경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는데, 어떤 분은 조교와 경교의 차이점은 ‘닭은 추우면 높은 횟대에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어요. 이게 조사의 가르침이에요. 그거참, 닭은 날씨가 추우면 횟대로 올라가. 그런데 오리는 날씨가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가. 이렇게 가르치는데, 어떤 조사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조교라는 것은, 조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국수에 월재수(掬水月在水)하고, 또 경교라는 것은 농화향만의(弄花香满衣)라. 참 기가 막힌 말씀인데, 국수라는 것은 물 뜰 국자, 움킬 국자가 있는데, 물을 그릇으로 뜬다는 말이에요. 물을 그릇으로 한 바가지 딱 떴는데, 뜨기는 물을 떴는데 물 안을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그 물속에 달이 있어요. 이 달은 생각지 못한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물을 떴단 말이에요. 물을 뜨고 물을 바라보니까 물 속에 달이 있어. 그게 조사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조사의 가르침은 뭐냐. 농화에 향만의라, 희롱할 농자, 꽃 화자. 희롱이라는 건 자꾸 가까이 하는 거죠. 꽃을 가까이 하고 꽃을 가까이하다 보니까, 향기 향자, 가득할 만자, 옷 의자, 그 꽃의 향기가 옷에 가득히 배어있다. 이걸 경교라고 해요. 경의 가르침이다. 참 기가 막힌 말씀이에요. 금강경을 읽고, 법화경을 읽고, 화엄경을 읽고, 열반경을 읽고, 천수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읽으면 그 법의 향기가 몸에 가득히 배어요. 그래 읽기는 경을 읽었는데 그 향기가 몸에 가득해요. 이걸 농화에 향만의라고. 챙기기는 마음을 챙겼는데 마음 하나를 딱 챙기고 나와보니까 그 마음속에 무진무궁하게 다 있어요. 그걸 국수에 월계수라, 눈을 뜨고 보니 물에 달이 있더라. 이런 식으로 죽 지금까지 법문을 해 온 법문이 마음법문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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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12일 음력 3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4-12
--법문(法門)이야기-- 이번 달 초하루 법문은 <법문(法門)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법문. 법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법문을 맨날 하는데, ‘법문은 무엇인가.’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법문은요, 법을 보이는 문이다.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보이고 싶은데 보일 방법이 없어서 문을 냈단 말이죠. 그래서 문이 없으면 법을 못 보이니까 법을 보이는 문을 내서 법을 보게 한다. 그것이 법문입니다. 言法門者 示法之門 開方便門 示眞實相언법문자 시법지문 개방편문 시진실상 법문은 시법지문(言法門者 示法之門)이라, 법을 보이는 문이다. 그것은, 문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문인데, 방편은 접근이라고 해요. 지붕에 올라가려면 그냥은 못 올라가니까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방편은 지붕에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은 거죠. 그래서 방편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는데, 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법, 방편문을 열어서 진실법을 본다. 그런데 이 진실법을 보이는 문이 법문이에요. 진실법을 보이는 문이 법문. 그러면 진실법이라는 것은 뭐냐. 부처님이 깨달은 법인데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연법이라고 해요, 인연법. 부처님이 인연법을 깨달아서 무아를 얻으시고, 또 해탈을 얻으시고, 극락을 얻으시고, 사바세계에서는 복락을 얻으셨다. 사바세계에서는 복으로 즐거운 복락, 극락세계에서는 지혜로 즐거운 안락, 그게 전부 인연법을 통달함으로 얻어진 결과입니다. 세상에서는 복의 즐거움을 얻고, 극락에서는 지혜의 즐거움을 얻는데, 그게 정토안락이다. 그게 극락세계죠. 근데 이 인연법이라는 것은 나기는 났는데, 인연생법(因緣生法)이, 모든 법이 인연으로 나는데, 그게 한군데 중심이 있는 게 아니에요. 또 변방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연법은. 그래서 그걸 났으되 난 것이 없는 적멸법(寂滅法)이라고 해요, 인연생법이. 생멸법이 난 곳에 난 것이 없고, 사라지는 곳에 사라짐이 없는 적멸. 적멸이란 생멸이 없다 이 소리예요. 그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해서 중도(中道)라고 해요. 인연생법은 적멸이요 중도이니, 그 중도가 어떻다는 말인가. 공공적적(空空寂寂)해요. 찾아보면 비고 비고 고요하고 고요해요. 그런데 항상 요요명조(了了明照)해요. 알 요자가 있는데 분명하다는 소리예요. 분명하고 분명하고 밝게 비춘다. 이게 인연법이에요. 인연생법이, 인연으로 생멸하는 법이 적멸중도이니, 또 공공적적하고 요요명조라. 이 법이 세상에서는 복의 즐거움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극락세계에서는 편안한 즐거움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해탈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대광, 대웅, 크게 빛나고 크게 웅장한 그런 지혜자재, 대광대웅 지혜자재법이 전부 이 인연법을 통달하느냐, 인연법을 통달하지 못하느냐에 차이가 있는 거지요. 이게 법문인데, 법문은 말로 하고, 행동으로 하고, 모양으로 하고 그래요. 언설법문(言說), 행위법문, 형상법문, 이게 전부다가 법을 알려주는 문이거든요. 闇夜明燈 암야명등 譬如闇中寶 無燈不可見 비여암중보 무등불가견佛法無人說 雖慧莫能了 불법무인설 수혜막능료(華嚴經 須彌偈品)(화엄경 수미게품) 근데 이 법문이 얼마나 중요한가. 비유로 말하면 법문은 암야명등(闇夜明燈)이라. 깜깜한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과 같다. 법문이 없으면 갈 길이 없어요. 어두운 밤에 불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듯이, 어두운 밤에 등불과 같은 것이 법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華嚴經 須彌偈品)>이라고 하는 경문에서 명등을 얘길 했는데, 이 밝은 등불이 하는 일이 뭐냐. 보물찾기하는 거예요. 보물. 그래서 비유하자면, 비여암중보(譬如闇中寶)는,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금은보화가 있는데, 무등이면 불가견이라(無燈不可見), 등불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보물이 있기는 있는데 못 본다 말이죠. 왜냐. 어두워서. 근데 어떡하면 보냐. 밝은 등불을 가지고 가서 비추면 보여요. 그래서 불법도 무인설하면(佛法無人說), 이 부처님이 보이는 이 인연법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말하지 아니하면, -말한다는 게 이게 법문이죠,- 법문을 하지 아니하면, 수혜막능료라(雖慧莫能了). 비록 지혜가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법문을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그러면 부처님이 보이고자 하는 극락법, 복락법, 이런 해탈법, 자재법, 지혜법을 그냥 어떻게 보이냐. 법문을 통해서 보인다. 보물이 있기는 있는데, 어두워서 안 보이니까 등불을 비추어서 그 보물을 얻는다. 이걸 법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법문은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이다. 標月手指 표월수지 手指標月 因指看月 수지표월 인지간월觀指爲月 亦亡其指관지위월 역망기지(楞嚴經제2권)(능엄경 제2권) 그다음에 법문은 표월수지(標月手指)라. 표라는 것은 목표라는 표자인데, 여기서는 가리킬 표자예요. 달을 가리키는, 표월, 수지, 손 수자, 손가락 지자, 손가락이다. 달이 있는데 달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달이 저기 있다’ 이렇게(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면 달은 저기 있고, 뭘로 가리키느냐. 수지, 손 수, 손가락 지, -발가락을 족지라고 그러는데, 손가락을 수지라고 그래요.- 손가락이다 그거죠. 달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서 달을 보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법문과 같다고 얘길 하거든요. 이 법문은 능엄경 제2권에 있는 법문인데, 수지로 표월하면(手指標月), -경문에 있는 내용이에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인지간월이라(因指看月). 그 손가락으로 인해서,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볼 관자, 달 월자, 달을 본다. 이게 방편이고 이게 법문이거든요. 손가락을 가리키는 목적은 달 보게 하는 데 있는 거예요. 그래 수지표월하면 인지간월이에요. 손가락으로 인해서 달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잘못해 가지고 관지위월하면(觀指爲月),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고 생각하고 달이라고 여기면, 이게 법문을 잘못 듣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냐. 역망기지라(亦亡其指). 그 손가락까지 또한 잃어버린다. 왜 그러냐. 손가락은 달이 아닌데 이걸 달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게 달이니까 손가락도 없어진 거예요. 변질됐다 말이지. 근데 이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도법인데, 적멸법이고, 무슨 말이든지 말을 하는 것은 생겼다 사라지거든요. 이건 생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적멸중도를 내가 지혜로 깨닫기 전에 그 적멸중도를 이야기한 말씀을 가지고 ‘이것이 모든 것이다.’라고 하면, 그 말씀은 생멸이라. 그래서 이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을 때 달을 못 보고 손가락으로 달이라고 여기는 거와 같다. 이렇게 되면 손가락도 제대로 못 보고 잃어버린 게 된다. 이 외에 비유가 많아요. 금강경에서는 <지아설법이 여벌유(知我說法 如筏喩者)라>, 정신희유분 제6(第六 正信希有分)에 나오는 법문인데,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아야 한다.’ 뗏목은 배인데요, 물 건너는 배는, 배가 없으면 물을 못 건너가는데, 그 배가 저 건너가고자 하는 피안은 아니에요. 이는 배를 통해서 저 언덕에 도달을 했으면 그다음부터는 배는 버린다. 법문은 물을 건너가는 배와 같다. 법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법문은 보물을 찾게 하는 밝은 등불과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러니까 법문을 잘 들어야 해요. 법문 안 들으면 안 돼요. 아주 잘 들어야 해요. 법문을 들어보면 맨날 똑같은 소리 한다 싶어서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저 법문 다 아는 법문이다 싶어 심드렁한 사람도 있는데 이게 잘못된 거고요. 법문을 잘 들으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면 이게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그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생각의 구조와 체계가 완전히 바뀌어요. 그걸 육종진동(六種震動)이라고 그러는데, 우주가 6가지로 막 진동을 한다. 그런데 늘 이 손가락만 보고 달을 못 보는 법문을 들으면 아무리 법문을 들어도 감동이 없어요, 진동이 없어. 심장이 안 움직이고. 이 눈동자가 안 움직여. 그걸 저는 표현할 때 말똥말똥 청법이라고 그래요. 그저 말똥말똥하게 법문을 들어. 눈이 완전히 광명이 나고 온몸이 움직여서 한량없는 감동을 얻는 게 그게 깨달음이거든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감동 없이 말똥말똥하게 법문을 들으면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나중엔 졸게 돼요. 그냥 조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반드시 말똥말똥 순서가 있어요. 그래서 조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법문은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래서 법문은 무조건 들어야 돼요. 법문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거기 때문에 다 깨달음이 들려지는 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말하든지 간에.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말고 법 자체를 봐야 돼요. 그래서 항상 들으면 그게 성불이고, 그게 해탈이고, 그게 극락이에요. 법문 듣는 것이 극락이고, 법문 듣는 것이 그게 깨달음이고, 그게 바로 해탈하는 거다. 중요한 거죠. 因果法門 인과법문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佛本行集經제48권) (불본행집경제48권)諸惡莫作 諸善奉行 제악막작 제선봉행自淨其意 是諸佛教자정기의 시제불교(法句經下卷,述佛品)(법구경하권,술불품) 白居易 謁鳥窠道林禪師 問曰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백거이 알조과도림선사 문왈 여하시불법대의 사왈諸惡莫作 衆善奉行 白曰 三歲孩兒 也解恁麽道 師曰 제악막작 중선봉행 백왈 삼세해아 야해임마도 사왈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人行不得 白遂作禮삼세해아수도득 팔십노인행부득 백수작례(傳燈錄제4권)(전등록제4권) 그러면 법문은 방편인데 어떤 방편문을 많이 여냐. 제일 많이 기본적으로 여는 게 인과법문(因果法門)이에요. 인과. 이게 아주 인연의 근본이거든요. 인과는 어떻게 해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이 따로 있고, 귀한 사람이 따로 있고, 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걸로 알아요. 그래서 조상 자랑하고, 지위 자랑하고, 신분 자랑하고. 요즘에는 외모 가지고 한몫 보려는 사람 많거든요. 이게 다 시대정신과도 뒤떨어진 거예요.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는 키 크고, 학벌 좋고, 지위 좋고, 소득 높으면 인기가 있었는데요. 2000년대 이후에 와서는 이거 다 쓸모없이 돼 버렸어요. 왜 그러냐. 그거 다 필요 없고, 나를 인정해주느냐,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 요 사람만 필요하게 된 거예요. 키 크고 돈 잘 벌고 해봐야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 사람,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거예요. 요새도 결혼하고 사람 만날 때 나 좋아하냐, 나 인정하냐 이 사람하고 해야지 괜히 다른 것 보고 하다가는 큰일 나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부처님 법하고 맞는 거예요. 부처님 법은 벌써 그 당시에 조상을 보지 마라, 용모를 보지 마라, 배경을 보지 마라. 그러면 뭘 보냐.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업을 봐라. 이게 행업(行業)이에요. 이게 인과법이에요. 그 사람이 조상이 어떻든, 농사지으면 농부고, 물건 만들면 물건 만드는 사람, 공장에 다니는 이고, 또 학문을 하면 학자고, 노래 부르면 가수지, 업만 소중하지 다른 건 다 소중하지 않다. 이게 부처님 법이에요. 이게 평등과 인과예요. 인과 속에는 평등이 있어요. 사람은 다 평등하다. 근데 뭐가 중요하냐. 업이 중요하다. 업은 행위인데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니까 나의 용모가 나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를 구제하거든요. 또 나의 배경이 나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를 구제하니까, 내가 어디에 소속되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이게 인과법이에요. 그래서 나를 어떻게 바꾸냐, 나를 누가 구제하냐. 나를 내가 구제하는 거죠, 누가 구제해. 나의 행위로. 나를 누가 바꾸냐. 내가 바꾸는 거죠, 나의 행위로. 이렇게 평등과 인과를 얘기한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자기 행위는 말하지 않고 자기 결과만 비관한다든지, 잘못되면 이것이 미혹인데, 내가 공부 열심히 안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지?’ 이러면 미혹이에요. 어떤 사람은 ‘나는 많이 먹는데도 살이 안 찐다.’는 사람이 있어요. 먹는다고 다 살찌는 게 아니에요. 잠을 잘 안 잔다든지, 너무 과도하게 움직이면 몸에 살이 못 쪄요. 또 어떤 사람은 먹는 것도 없이 살만 찐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완전히.. 아니 먹는 거 없이 어떻게 살이 쪄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은 먹은 게 기억이 안 날 뿐이에요. 먹기는 엄청 먹었는데 먹는 게 기억에 없는 거예요. 기억이 안 나. 아주 재밌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며칠 동안 잠 한숨도 못 잤다는 사람이 있어요. 잠 잔걸 기억 못 할 뿐이에요. 며칠 동안 잠 못 잘 수가 없어요. 그러면 카메라 켜놓고 지켜볼까요? 그러면 안 한다고 그래요. 자기도 잔 거 알거든, 또. 그러니까 이게 순전히 자기 업이 자기를 바꿔요. 다른 건 바꿀 수가 없어. 그런데 이걸 항상 우리가 놓치고 살아요. 그래서 자기 업을 중요시 여기는 게 아니라 누구 자랑하기 바빠. 내가 어떤 사람이다. 그건 허망하고 무상해서 금방 사라지고 자기 업만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불교라는 것을, 결국은 깨달아야 실상법을 아는 거고, 실상법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스승은 가르쳐야 되고 제자는 실행해야 되는 거거든요. 이 가르치고 실행하는 거 외에는 실상법을 부처님과 똑같이 깨닫는 건 불가능해요. 깨달아야 되요. 그러니까 스승들은 열심히 가르치고, 제자들은 진실하게 실행해서 그걸 깨달아야만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는 거예요. 그니까 불교경전 보면, 주로 실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어요. 나도 처음에 절에 와서 뭐 예불을 해라, 뭐 운력을 하라, 뭐를 하라 하는데, 매일 하라 소리만 하지 불교가 뭐다고 불교 내용을 가르치는 게 별로 없더라고. 얼마나 신경질이 나고 답답했는지 몰라요. 아니 불교가 뭔지 시원하게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별로 없어요, 맨날 뭘 하라고 해요. 근데 구조가 그렇더라고. 업을 바꿔서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업 바꾸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때 그걸 알아요? 그거라도 그걸 지금 나같이 설명을 해주지. 몰라요. 전부 실천, 수행 쪽에 말이 많은 것도 업을 바꾸게 하는 거니까 그런 거예요. 그게 바로 수행법문이죠. 불교가 어렵다고 그러지만 어려운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게 중요해요. 불교를 가르친 여러 가지 말씀을 다 배우려면 못 배워요. 문제는 실천하면 된다 그거죠. 그래서 맨날 하는 법문이 있는데, 그 법문이 칠불통계(七佛通戒)라는 법문이에요. 칠불은 여러 부처님들이, 통계는 모두 가르쳤다, 이 말인데, 통자는 모두라는 말이고, 계라는 건 가르쳤다는 말이고, 모든 부처님이 모두 가르친 게 칠불통계인데, 법구경 술불품(法句經下卷,述佛品)이라는 데 있어요. 제악은 막작하고(諸惡莫作),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제선은 봉행하고(諸善奉行),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고, 자정기심(自淨其心)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맑혀라. 시제불교(是諸佛教)이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짓지 말고, 선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 행하고, 마음을 맑혀라. 자정기심. 자기마음을 다 자정하라. 스스로 맑혀라. 그러면 이것이 제불교니라. 여러 부처님의 똑같은 가르침이니라. 법구경 술불품의 법문인데,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실천하려고 들면 정말 이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욕심내지 말고, 제악막작은 하지 말고 그냥 소악이라도 막작하면, 적을 소자, 적은 악이라도 짓지 아니하면 그게 불교 실천이고 수행이고요. 제선은 그만두고, 적은 선, 몇 가지만이라도 받들어 행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정기심은 항상 해야 돼요. 내 생각을 맑히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모든 것이 내 생각에서 나오니까. 근데 경덕전등록이라는 30권 책이 있는데, 고승들 행적을 적어놓은 책이거든요. 30권 중에 4번째 권에 도림(道林)선사라고, 길 도자, 수풀 림자, 이 도림선사라고 하는 행장이 적혀 있는데, 그 도림선사를 아주 문장으로 유명한 소동파가 가서 뵙게 됐어요. 도림선사한테 소동파가 물었어요. “여하시불법대의(如何是佛法大意)냐. 부처님 법에 큰 뜻, 부처님 법에 중심의 큰 뜻이 무엇이냐.”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제악막작하고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다.” 경에는 제선(諸善)이라고 많이 썼는데 보통 말할 때는 많을 중자, 중선이라고 해요. 제나 중이나 많다는 의미죠. “불교의 대의는 제악은 막작하고 중선은 봉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명쾌하잖아요. 그러니까 소동파가 그 소리가 영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소동파를 백거이(白居易)라고 해서 백이라고 하는데, 백왈(白曰), 말하기를, “스님이 하신 그런 말씀은 3세해아(三歲孩兒)라도,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야해임마도(也解恁麽道)라. 야해는 또한 안다, 임마도는 당신과 같이 그렇게 말할 줄은 세 살 먹은 아이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랬거든.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하는 말씀이, 참 기가 막힌 말씀인데, 이 말이 젊을 때부터 그렇게 감동이 왔어요. 그 두 번째 말씀,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삼세해아가 수도득이나(三歲孩兒雖道得) 팔십노인이 행부득(八十老人行不得)이라. 세 살 먹은 아이가 비록 말할 수는 있지만, 팔십 노인도 실행할 수는 없다.” 행부득이라는 것은, 행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행을 하지 못한다는 거거든. 팔십 노인도 다 못해요. 나이 든다고 다 잘하는 줄 알아요? 나이 들어도 똑같아요. 하는 짓이 안 바뀌어요. 노인이 왜 저래.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젊은 사람이 못하는 건 노인도 못해요. 허망한 거예요, 아주. 삼세해아가 수도득,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비록 말은 하지만, 팔십 노인도 행부득이라, 팔십 노인이라도 실행할 수는 없다. 생각을 해봐요. 모든 선을 다 실행하고, 모든 악을 하나도 안 지으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참 기가 막히지. 그러니까 소동파가 거기서 항복을 했어. 백수작례(白遂作禮)라. 백거이라는 소동파가 드디어 수자, 지을 작자, 예배 예자, 드디어 예배를 했다. 항복했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중요한 게 업을 바꾸는 인과법문이고, 업을 바꾸는 수행법문이거든요. 이런 법문을 자꾸 들어야 이게 성불이 돼요. 극락세계 가고 복을 받는다. 願力法門 원력법문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善男子 應修十種廣大行願 何等為十 一者 입부사의해탈경계 보현행원품 선남자 응수십종광대행원 하등위십 일자禮敬諸佛, 十者普皆迴向 虚空界盡 我禮乃盡 而虚空界不可盡故 我此禮 예경제불, 십자보개회향 허공계진 아례내진 이허공계불가진고 아차예敬 無有窮盡 如是乃至眾生界盡 眾生業盡 眾生煩惱盡 我禮乃盡 而眾生경 무유궁진 여시내지중생계진 중생업진 중생번뇌진 아례내진 이중생界乃至煩惱無有盡故 我此禮敬 無有窮盡 念念相續 無有間斷 身語意業 계내지번뇌무유진고 아차예경 무유궁진 염념상속 무유간단 신어의업無有疲厭(40華嚴經제40권) 무유피염(40화엄경제40권) 그다음에 많이 하는 게 원력법문(願力法門)이에요. 원을 세워야 되거든. 천수경에도 보면 전부 원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있거든요. 사홍서원도 그렇고. 근데 원 중에 가장 큰 원이 <법계원왕 대원법문> 이게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에요. 법계원력의 왕이 보현보살인데, 법계원왕의 대원법문이다, 크게 원하는 법문이다. 그런 법문을 읽기만 해도 그게 성불이에요. 우리 한국불교에서 보면 늘 독송하는 게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 보문품, 아미타경, 보현행원품, 요런 정도가 상용지송이라고 그래요. 상용지송경이라. 항상 하는 지송경이거든요. 수지독송하는데. 그런데 원을 말한 건 역시 보현행원품이에요. 보현행원품이 80권 화엄경에도 없고, 60권 화엄경에도 없고, 40권 화엄경 맨 마지막경 1권이 보현행원품, 우리가 읽는 내용이거든요. 40권 화엄경 마지막 권 1권이에요. 그런데 화엄경 전체에 아주 결론이고 실천이 바로 이 보현행원품이에요. 이거는 행원이, 실행하고 서원하는 행원이 바로 성불이고, 화엄경이거든요. 시작과 결과는 다르지 않다. 이게 원융법이에요. 그래서 시작이 대원이 되면 금방 성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을 세워라. 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서원을 세우기를 그렇게 강조를 해요. 그래서 인과법문, 원력법문은 법문 중에 가장 많이 하는 중요한 법문인데, 그런 법문을 듣고 인과를 믿고 원력을 세우면, 서원을 발심이라고 해요. 이게 신심과 발심이거든. 인과를 믿고 원을 세우면 그것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거다. 그래서 발보리심(發菩提心). 신인과(信因果). 그러면 성불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법문을 죽 계속해주시니까 법문을 많이 들어라. 듣는 것만큼 공덕이 된다. 그리고 인과를 믿어라. 또 서원을 세워라. 서원이 확실하면 바로 성불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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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13일 음력 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3-13
- 唯心法門(유심법문)과 修心工夫(수심공부) - 안녕하십니까. 초하루 법회에 왔습니다. 오늘 법문은 <마음법문과 마음닦음>, 마음법문을 어려운 말로 유심법문(唯心法門)이라고 그러는데요, 오직 마음뿐이다, 또 마음닦음을 수심공부(修心工夫), 마음 닦는 공부,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심법문 수심공부. 불교는 해탈인데, 해탈의 원리는 인연법이에요. 그런데 인연을 닦고 이루는 과정을 말할 때 <업으로 해탈을 이룬다>, 이것이 삼세업인업과(三世業因業果), 삼세업과론이에요.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선업은 선과를 이루고 악업은 악과를 이룬다. 그래서 삼세업과를 말씀하시고, 해탈을 하는데 다른 데서 해탈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업으로 해탈이 된다. 고통을 느끼는데 다른 데서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니라 업으로 고통을 느낀다. 이것이 삼세업인업과, 업과 인연, 이것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업을 중시해요, 업. 삼세인연, 업인업과. 그러니까 업만 바꾸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걸 바라지말고, 좋은 업을 지어라. 나쁜 걸 싫어하지 말고, 좋은 업을 지어라. 이게 업인업과 삼세인연이거든요. 업의 결과는 좋은 업의 결과든지 나쁜 업의 결과든지 업의 인연에 있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업인만 바뀌면 업과는 저절로 바뀐다. 그런데 용수보살 이후에 뭘 가르쳤나 하면, 업인업과가 불생불멸 공이라고 가르쳤어요. 업도 불생불멸이고, 업의 결과도 불생불멸이다. 정해진 게 없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업인업과는 그 본질, 실상에 있어서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불생불멸이다. 이걸 공상(空相)이라고 하거든요, 불생불멸상을. 그러면 왜 우리 눈앞에 온갖 것이 보이고 우리 귓가에 온갖 것이 들리나. 그거는 중생의 의식전변(轉變)이다. 어려운 말인데, 생각이 바뀌고 변한 거다. 이게 유식교설(唯識敎說)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 밖에 세계가 있는 걸로 보이는데, 세계가 있기 전에 의식이 먼저 있었다. 그래서 의식이 형상으로 바뀌었다고. 바뀐다는 말을 전환이라고 하는 바뀔 전자(轉), 변할 변자(變), 전변이라고 해요. 우리가 산을 볼 때 의식이 산으로 바뀐 거예요. 의식이 형상으로 바뀌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뭘 생각할 때 의식이 생각으로 바뀐 거예요. 그래서 생각을 볼 견자,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세계를 형상 상자, 상분(相分)이라고 해서, 물질을 볼 때도 내 생각이 물질로 변한 것이다. 뭘 생각을 할 때도 생각이 자기 주관적인 생각으로 변한 것이다. 사실은 불생불멸 공적실상(不生不滅 空寂實相)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대승불교 첫 번째 가르침이라고 대승시교(大乘始敎)라고 그래요, 시작할 시자. 그래서 반야바라밀 공적을 가르치는 것을 무상시교(無相始敎), 형상이 없는 것을 가르치는 시교다. 유식전변(唯識轉變), 생각이 변한 걸 가르치는 것을 유상시교(有相始敎), 형상이 있는 것을 설명하는 시교다. 그런데 화엄법화(華嚴法華)에 가면 마음을 가르쳐요. 이것이 유심소현(唯心所現), 유심법문(唯心法門)이에요. 반야유식에서는 공적함을 무상시교로 가르치는데, 화엄경, 법화경에 가면 유심소현,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이게 전부 인연법인데요, 초기불교에서는 업인업과, 인연을 말하고, 대승시교에서는 무상유식인연을 말하고, 화엄법화에서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유심소현 인연을 말해요. 그래서 오늘 법문은 유심법문, 오직 마음이다. 이것의 말씀을 드리는데요. <모든 건 마음이다.> 이거죠. 일체가 유심이다. 유심소현이다.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심여공화사 화종종오음 일체세계중 무법이부조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약인욕구지 삼세일체불 응당여시관 심조제여래(60華嚴經夜摩天宮偈品) 이런 건데, 화엄경에 마음은 그림 그리는 화가와 같다. 화가는 모든 걸 다 그리죠. 그래서 마음은 세계도 그리고 중생도 그리고, 제불도 그리고, 보살도 그리고, 안 그리는 게 없다 이거예요. 일체세계중에 무법부조라(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일체 세계 가운데 어느 것도 마음은 만들어 내지 않는 게 없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화엄경 유심법문이에요. 그래서 일체중생도 마음이 만들었고, 천지만물도 마음이 만들었고, 삼세제불,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도 마음이 만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냐. 부처님을 알고 싶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을 해라, 어떻게. 심조제여래(心造諸如來)라. <마음이 모든 부처님을 만들었다>라고 관찰을 해라. 그러니까 심외무불(心外無佛)이고,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심외무생이고, 마음밖에 중생이 없고, 심외무물이고, 마음밖에 물건이 없다,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거든요. 三界虚妄 但是心作 (60華嚴經 十地品 제6現前地) 삼계허망 단시심작(60화엄경 십지품 제6현전지)三界所有 唯是一心 (80華嚴經 十地品 제6現前地) 삼계소유 유시일심(80화엄경 십지품 제6현전지) 삼계가 허망하다(三界虚妄). 삼계는 모든 세간법인데, 산하대지 물질세계, 생로병사 중생세계, 일체 분별의식세계 다 이 세계가 삼계인데, 삼계는 허망하다. 불생불멸이다 이 말이죠. 자성이 없다. 단시심작(但是心作)이라,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 60화엄경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했고. 80화엄경에서는 삼계소유가(三界所有), 삼계에 있는 바가, 유시일심(唯是一心)이다, 오직 한마음이다. 이렇게 화엄경 십지품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이게 유심법문이에요. 중생이 있기 전에 마음이 있다. 제불이 있기 전에 마음이 있다. 세계가 있기 전에 마음이 있다. 유심법문. 오직 마음이다 이거죠.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則攝 一切世間法 出世間法 소언법자 위중생심 시심즉섭 일체세간법 출세간법(大乘起信論) (대승기신론)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는 법이라고 하는데 법은 세계도 법이고, 중생도 법이고, 제불도 법이고, 일체 의식분별도 법이고 일체 존재가 다 법인데 이 법이라는 건 중생심이다. 소언법자는 위중생심이니(所言法者 謂衆生心), 근데 이 마음이 일체 세간법을 다 거둬들이고, 중생법을 다 거둬들인다 이 말이죠. 일체 출세간법을 다 거둬들인다. 일체 제불법을 다 거둬들인다. 마음을 떠나서 삼세제불이 없고, 마음을 떠나서 일체제불이 없다. 모든 것은 마음이 다 거둔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대승기신론이고요. 言辭所說法 小智妄分別 是故生障礙 不了於自心 언사소설법 소지망분별 시고생장애 불요어자심不能了自心 云何知正道 彼由顚倒慧 增長一切惡 불능요자심 운하지정도 피유전도혜 증장일체악(80華嚴經 須彌頂上偈品) (80화엄경 수미정상게품) 그리고 이 마음을 가르치는 것뿐인데 이런 이야기를 말로써 하면, 소지로 망분별(小智妄分別), 중생들이 조그마한 지혜로 허망하게 자의 해석을 해서,- 분별이란 건 자의 해석, 자기 생각으로 해석한다 말이죠.- 장애를 낸다. 마음으로 바로 못 들어가고 자기 해석에 자기가 걸려서 장애가 생겨요. 앞을 가로막아. 그래서 불요어자심(不了於自心)이라, 자기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불능요자심(不能了自心)이면, 뭘 안다, 깨닫는다 하는데, 안다, 깨닫는다는 게 뭐냐. 자기 마음을 안다. 그게 아는 거다. 자기 마음을 안다. 그게 깨닫는 거다. 그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에요.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면 운하지정도(云何知正道)리요, 어떻게 바른 진리를 알겠는가. 그래서 뒤바뀐 생각을 한다 그거죠. 뒤바뀐 생각이 뭐냐 하면, 반야심경에서 전도몽상이란 말을 했는데, 모든 물질이 마음에서 나왔는데, 이걸(컵을 드시면서) 밖에서 온 줄 알고 이걸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해요. 이걸 전도몽상이라고 해요. 미혹(迷惑)이라고 하는 것은 유심소현을 모르고 오직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인 줄을 모르고, 외물집착(外物執着)이라. 밖의 물건에 집착을 한다. 이걸 미혹이라고 해요.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으로 좋다고 만든 거고, 싫어하는 것도 내 마음으로 싫다고 만들었는데, 자기가 싫다고 만든 것에 공포감을 느끼고, 자기가 좋다고 만든 것에 탐욕심을 일으켜서, 이 공포와 탐욕으로 온갖 고생을 하는 게 일체중생인데, 이걸 전도몽상이라고 해요. 뒤바뀌어서 꿈꾸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중생들이 전부 이렇게 미혹한 생각을 일으켜서 증장일체악(增長一切惡)이라, 모든 악업을 증장시킨다. 그러니까 허물 중에 최고의 허물은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모르는 허물이죠. 이게 유심법문이에요. 佛子 如來智慧 無相智慧 無礙智慧 具足在於衆生身中 불자 여래지혜 무상지혜 무애지혜 구족재어중생신중但愚癡衆生 顚倒想覆 不知不見 不生信心 단우치중생 전도상부 부지불견 불생신심 如來智如是 衆生悉具有 顚倒妄想覆 衆生不知見 여래지여시 중생실구유 전도망상부 중생부지견(60華嚴經 寶王如來性起品)(60화엄경 보왕여래성기품) 그리고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는 지혜가 있는데, 지혜는 뭐냐.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건 지혜고. 생각은 뭐냐. 물질이 마음이라는 걸 모르고 분별하는 걸 생각이라고 해요. 그래서 생각은 미혹한 것이고, 지혜는 깨달은 것이다, 이 말이거든요. 모든 게 마음이란 걸 알면 그건 지혜예요. 근데 내 생각과 상관없이 내 몸도 있고, 세계도 있고, 인간도 있다. 이건 생각인데 그건 미혹이에요. 그런데 일체 중생에게 여래의 지혜(如來智慧)도 있고, 무상지혜(無相智慧), 형상 없는 지혜도 있고, 무애지혜(無礙智慧), 걸림이 없는 지혜가 구족재어중생신중(具足在於衆生身中)이라, 중생의 몸속에 아주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어요. 생각 속에 지혜가 있거든요. 얼음 속에 물이 있듯이, 생각 속에 지혜가 있는데 생각이 지혜의 눈을 가려서 생각이 됐을 뿐이거든요. 그런데 단(但), 오직, 우치중생(愚癡衆生)에게 전도상이 부하야(顚倒想覆), 전도된 생각이 덮어서, 마음 밖에 물질이 있다, 이렇게 분별하고 집착해서 공포와 탐욕을 일으키는 이런 전도상이 덮여 가지고 ,부지불견이라(不知不見), 중생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못 깨닫는 것은 자기 생각 때문에 못 깨닫는 거예요. 모든 허물은 생각에게 있어요. 생각은 뭐냐. 나와 상관없이, 내 생각과 상관없이 이 몸이 있고, 마음 밖에 물질이 있고, 마음 밖에 중생이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게 이게 생각인데 이것 때문에 못 깨달아요. 부지불견하나니라. 그래서 이와 같이 여래 지혜가 중생에게 다 갖추어져 있는데, 전도망상이 덮여서 중생이 알고 보지 못한다(如來智如是 衆生悉具有 顚倒妄想覆 衆生不知見). 이렇게 설명하는 게 대승불교 유심법문이에요. 대승불교 유심법문. 마음뿐인 거예요. 그래서 마음 하나 닦으면 끝나는 거예요. 마음 하나 몰라서 괴로워하는 거예요. 空空寂寂 無物可遣 了了明明 無物可求 공공적적 무물가견 요요명명 무물가구卽心卽法 法法圓融 一多相攝 隨須圓成 즉심즉법 법법원융 일다상섭 수수원성雖然如是 種種機緣 修行不無 定慧卽是 수연여시 종종기연 수행불무 정혜즉시攝散無念曰定 照見實相曰慧 섭산무념왈정 조견실상왈혜攝念觀照 觀行力增 情塵漸盡 覺智圓成섭념관조 관행력증 정진점진 각지원성 그럼 마음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공공적적(空空寂寂)해요. 비고 비고 고요하고 고요해. 마음은 찾아보면 없어요. 공공적적한 게 마음이다. 그래서 무물가견(無物可遣)이라, 어떠한 물건도, 어떠한 것도 버릴 게 없어요, 마음은. 마음자체가 공공적적하니까. 또 마음이란 요요명명(了了明明)하다고. 알 요자가 있는데, 수료한다는 요자, 알고 알고 밝고 밝고. 밝을 명자. 공공적적한데 요요명명해요. 비고 비고 고요하고 고요한데, 알고 알고 밝고 밝아. 이게 마음이에요. 그래서 무물가구(無物可求)라, 어떤 것도 구할 것이 없다. 이 마음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버릴 게 없고, 어떤 것도 구할 게 없다. 이걸 아는 게 마음을 깨달은 사람의 정신세계에요. 구하려고 하는 것도 내가 내 마음을 몰라서 하는 전도 행위고, 또 버리려고 하는 것도 내가 내 마음을 몰라서 하는 전도 행위, 뒤바뀐 행위다, 뒤바뀐 동작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 즉심즉법(卽心卽法)이다. 법이란 마음이다. 곧 마음이 곧 법이다. 법이란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 티끌도 법이고 사람도 법이고, 태어나는 것도 법이고, 죽는 것도 법이고, 있는 것도 법이고 없는 것도 법이다. 근데 그 모든 것이 모두가 마음이란 거예요. 즉심이 즉법이다. 즉심즉법 이거 몰라서 헛고생하는 거예요. 즉심즉법이다, 곧 마음이 부처다, 이런 말 종종 하거든요. 즉심정토(卽心淨土)다, 마음이 곧 정토다. 전체가 어떤 것도 마음이다, 즉심즉법이다. 그러니까 법법이 원융해요(法法圓融). 이것도 마음이고 저것도 마음이니까 마음이 원융할 거 아니에요. 법법이 원융해. 법법이 원융하다는 말은 조그마한 티끌이 온 우주와 통하는 거예요. 이걸 원융이라고 해요. 티끌과 시방우주가 다르지 않다. 이게 화엄경이에요. 일미진중에 함시방이라(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을 다 거둬들인다. 이게 유심법문이거든요. 마음이 곧 법이니 법과 법이 원융하도다. 티끌이 우주를 다 삼키고 우주가 티끌을 삼키고, 찰나가 무량겁을 다 삼키고 무량겁이 찰나를 삼키고. 이게 법법원융이죠.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일다상섭(一多相攝)이라, 하나가 있으면 모든 걸 다 거두어들여요. 또 모든 것에는 하나를 다 거둬들여요. 하나가 있는 곳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있는 곳에 하나가 있다. 이걸 상섭이라고 해요, 서로 상자, 거둘 섭자. 법법원융 일다상섭. 그래서 수수원성(隨須圓成)이라, 이 수(須)자는 필수라는 수자, 구할 수자인데, 구함에 따라서, 내가 하나를 구할 때는 하나를 이루고 많은 것을 구할 때는 많은 것을 이루어서, 중생이 되고자 할 때는 중생이 되고, 보살이 되고자 할 때는 보살이 되고, 부처 되고자 할 때는 부처 되고, 자기 구하는 대로 다 이루는 게 이게 마음법문이에요. 왜 안 이루어지냐? 몰라서 하는 얘기에요. 자기가 안 구해서 안 이루어지는 거예요. 구하기는 안 되게 하는 걸 구해놓고 바라기는 되는 걸 바라니까 안 되는 거죠. 어떻게 안 되냐. 구하기는 몸이 날씬한 걸 구하는데, 먹기는 뚱뚱하게 먹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되기는 부처 되려고 하는데, ‘나는 중생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부처가 되고 싶으면 ‘나는 부처가 되야 된다.’고 구하면 부처가 되는데, ‘나는 중생이야, 그러니까 나는 부처가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고 말로는 “성불하고 싶다.” 이런다고 해요. 성불 안 하려고 해요. 말로는 “성불합시다.” 그러는데 그거 거짓말이에요. “성불이 됩니까?” 이런단 말이에요. “말이 쉽지 그게 되나요.” 그런단 말이에요. 말하고 법하고 틀린가. 생각이 그걸 가로막아서 틀린 거예요. 그래서 수수원성, 구함에 따라서 원만히 이루는 것, 그게 유심법문이에요. 다 중생이라고는 믿는데 부처라고는 안 믿어. 안 된다는 건 믿는데 된다는 건 안 믿고, 작은 것이라고는 믿는데, 작은 것이 큰 것이라고는 안 믿어요. 또 큰 것이라고는 믿는데, 큰 것이 작은 것이라고는 안 믿어. 그래서 ‘높은 사람이다.’라고 하면 항상 높게만 있는 줄 알아요. 천만에요. 높은 속에는 거기 낮은 게 있는 거예요. 근데 높은 것만 알면 전도몽상이고 범부미혹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닦아야 되나. 닦는 건요. 일체 선법을 닦고, 일체 악법을 멀리하는 것은 똑같아요. 처음 업인업과 수행이나, 복을 닦고 죄를 소멸하는 행위는 똑같고, 이 마음공부만 특별한 거예요. 마음공부는 뭐냐. 정혜쌍수(定慧雙修)인데, 정이라는 것은 선정(禪定)이란 정자인데, 딴 게 아니에요. 밖으로 막 되고 안되고, 괴롭고 즐겁고 원망스럽고 공포스럽고 하는 이런 게 생각 티끌이라고 해요. 생각 념자, 티끌 진자. 염진(念塵). 우리가 근심 걱정하는 걸 보면, 내 몸 걱정, 다른 사람 걱정, 재물 걱정, 그것뿐이에요. 몸 생각, 사람 생각, 재물 생각. 재물이란 건 한마디로 말하면 돈이거든요. ‘저 사람 무슨 생각하지?’ 물을 것도 없어요. 돈 생각 안 하면, 사람 생각 안 하면, 제 몸 생각하는데 묻긴 왜 물어요. 뻔한 건데. 그거 외에는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이걸 전부 티끌이라고 해요. 티끌, 몸 티끌, 사람 티끌, 돈 티끌. 전부 여기서만 맴돌다가 죽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생각을 전부 거둬서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이걸 섭산무념(攝散無念)이라고 하는데, 산란한 거 몸으로 흩어져 나가고, 사람으로 흩어져 나가고, 물질로 흩어져 나가는 이런 산란심을 거둬들여요. 그래서 몸 생각도 안 하고, 사람 생각도 안 하고, 물질 생각도 안 하는 걸 무념이라고 해요. 섭산무념. 아무 생각 안 하는 거예요. 이걸 정(定)이라고 해요. 이게 마음공부에요. 어려운 거 하나도 없고, 복잡한 거 하나도 없고, 생각을 딱 거두어서 생각을 안 일으키는 것을 정이라고 그런다. 그다음에는 조견실상(照見實相)이라, 생각을 가둬서 생각을 안 일으키고 가만있으면, -그냥 가만있으면 조금 있으면 존다고요, 졸아.- 그러면 내 마음의 근본이 뭔가, 보는 거예요, 자기 마음을. 그러면 생각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눈 감고 졸지도 않고, 마음을 딱 봐. 그게 볼 조자, 볼 견자, 조견이거든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는 데, 본다는 소리에요, 조자도. 볼 조. 조견실상이라, 자기 마음의 진실상을 보는 거예요, 그냥. 눈을 앞으로 뜨면 산란이니까, 눈을 크게 앞으로 뜨지 말고, 그냥 생각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으로 마음의 진실상을 다 보는 거예요. 그걸 혜(慧)라고 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정을 생각을 그친다고 그칠지(止)자를 쓰고, 혜를 마음을 본다고 볼 관(觀)자를 쓰고. 지관정혜(止觀定慧)가 같은 건데, 처음에 시작할 때는 지관이라고 하고, 점점 익숙해가면 정혜라고 하고. 그것뿐이에요. 일체 복을 닦고 죄를 멀리하는 건 똑같고, 마음공부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지악수선(止惡修善)은 똑같아요. 악을 중지하고 선을 닦는 건 하나도 다를 바가 없고, 다만 생각을 거두어서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이걸 섭산무념이라, 산란함을 거두어서 망녕된 생각을 안 일으킨다. 그건 정이고. 조견실상이라, 마음의 진실상을 끊임없이 본다. 그걸 혜라고 그러거든요. 조견실상왈혜(照見實相曰慧)다. 그러면 조금 하다가 ‘나는 왜 안 깨달아지지’, 이건 벌써 딴생각을 일으키는 거예요. 정을 안 닦는 거예요. 요것 때문에 또 못 깨달아요. ‘내가 공부를 오래 했는데 왜 아직까지 못 깨닫냐.’ 무량원겁이 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하는데, 오래 한다, 적게 한다는 건 분별이지 마음 진실상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깨닫는다, 못 깨닫는다, 된다, 안 된다, 이런 생각 일체 안하고 그냥 보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순식간에 깨달아. 근데 조바심내고 딴생각하면 가도 가도 못 깨달아요. 조바심도 내지 말고 다른 생각도 내지 말고 오직 보기만 해라. 그래서 관행력이 증장하면(觀行力增), 그 보는 힘이 점점 깊어지고 강해지면, 정진이 점진하야(情塵漸盡), 그 생각의 티끌이, 몸 생각, 죽는 생각, 내세에 어찌될까, 내세에 공포상, 또 아들걱정, 딸걱정, 친구걱정, 또는 수레소리 나는 거 걱정, 이런 거 하나도 없어요. 친한 사람 있으면 걱정하고 그러는데, 또 가족 걱정하는데 나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식도 나하고 똑같고. 친한 사람도 나하고 똑같고. 아들, 딸도 나하고 똑같고. 근데 웬 사람들이, ‘나는 몸이 약해도 아들, 딸들은 몸이 약하면 안 되겠다,’ 이런 소리를 해요. 그게 말이 돼요? 그게 말이 되냐고. ‘나는 술을 먹어도 아들, 딸들은 술을 안 먹었으면 좋겠다’, 그게 말이 돼요? 이건 전부 다 감정의 티끌이지 진실상이 아니다. 그런데 마음공부가 깊어지면 이런 감정의 티끌이 점점 없어져요. 그래서 각지가 원성(覺智圓成)이라, 깨달은 지혜가 원만히 이루어진다. 이게 수심공부거든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유튜브 <진관사TV>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4fBpy68Ys&t=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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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도량참법기도] 2월 18일-21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1-02-21
반갑습니다. 코로나가 참 질기긴 해요. 벌써 1년하고도 몇 개월이 넘어가는 거 같아요. 본격적으로 코로나가 시작된 건 작년 2월인데, 지금 2월이니까 1년이 된 거죠. 일상이 되어버린 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게 참 위대하다.’라는 생각도 들고요. 특히 신행적인 측면에서 늘 많은 불자가 함께하던 마음의 정원 진관사에 지금은 몇 분의 신도분들과 함께, 또 유튜브로 -아마 지금 제 모습을 보고 계실 거라고 아는데요,- 시청하시는 분들도 반갑습니다. 진관사 유튜브 채널이 있더라고요. 지금 유튜브 채널을 보시는 분들은, -요즘 유튜브를 보면 그러더라고요, <좋아요>를 눌러야 된다고, 좋아요. 구독도 눌러야 되지만,- <좋아요>를 눌러야 된답니다. 제가 이렇게 회향 덕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좋아요>가 많으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없지요. 그래서 <좋아요>를 꼭 눌러주시고. 유튜브 환경이 됐어요. 그게 영상으로, 유튜브로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이 되어서 멀리서도 함께 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 이것도 코로나로 인한 변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코로나 대응으로 각국의 좋은 평가들을 받고 있죠. 전문가들은 “눈 떠보니 선진국이더라.”라는 표현도 합니다. 그만큼 방역도 잘하고 또 우리 시민들의 <참여 방역>이라는 차원에서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의 그런 자주적인, 주체적인 그런 방역을 잘하고 있죠. 우리 불자들은 더더욱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안 와, 절에 안 와요. 딴 데는 너무 와서 난리인데, 우리는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우리 의식들이 그만큼 선진화돼 있다고 봐야 됩니다. 그중에서도 요즘 새롭게 이야기되는 것 중의 하나가 서로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뢰자본>이라는 말로 씁니다. 국가나 정부,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이 신뢰라는 게 그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자본이다.”라는 거예요, 자본. 우리나라는 그 신뢰자본이 알고 보니까 우리 일상에서 많이 작동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신뢰라는 게. 자본이란 말은 말 그대로 재산이잖아요. 그런데 신뢰라는 것이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거. 그런데 그 재산이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작동이 우리 서민들의 삶 속에서만 작동을 해요. 서민들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신뢰자본을 사회전반으로, 아주 잘 사는 1%부터 중산층인 99%까지 전부 작동을 해야만 그 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작동하는 그런 사회로 평가받을 수가 있고,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갈 수 있는 거거든요. 신뢰자본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전문가들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기차 타러 가서 서울역에 가보면 개찰구에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또 우리나라는 커피숍에 가면, 요즘 젊은이들이 노트북을 가지고 다녀요. 그런데 노트북을 놓고 화장실을 가요. 이건 외국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외국 여행을 다녀보면 다 없어집니다, 노트북. 또 한 예로는 택배 같은 거. 택배기사가 집 앞에 놓고 가요. 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신뢰라고 하는 게 그만큼 자본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신뢰자본이라는 게 서민들의 삶 속에서만 작동을 해요. 이게 올라가서 조금 많이 배우고 조금 많이 갖고 많은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똑같이 작동을 해야 된다, 앞으로는. 그런데 이것이 신뢰자본이라는 문제를 개인의 삶 속으로, 우리 불자들의 삶 속으로 가져오면 믿음이라고 하는 게 자본이 된다는 거잖아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내 삶에 재산이 된다는 거죠. 내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고,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고, 부처님 말씀을 증득하는 게 재산이 된다는 거예요, 신뢰자본 측면에서 보면. 근데 그게 잘 안 느껴져요. 신뢰자본이라고 하는 사회자본도 지금 얘기하니까 그런 게 있구나 하지,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신뢰라는 것,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얼마큼 넉넉하게, 얼마큼 잘 살게 하는지 그러한 이야기를 조금 할까 합니다. 오늘은 자비도량참법 회향 날이죠. 신뢰라고 하는 것, 믿음이라고 하는 것, 믿음 자본, 믿음자산이라고 하는 것, 믿음자산은 자비도량과 직결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비도량참법 회향 법문을 말씀을 하셔서 ‘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려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특히 진관사에 나오는 불자분들은 삶을 되게 열심히 살아요. 다른 절에 가도 똑같은 얘길 합니다마는, 그래도 진관사 불자분들은 굉장히 열심히 살고, 스님들의 이야기도 잘 따라 하고, 또 부처님 말씀도 잘 믿고, 그래서 열심히 살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하죠. 살다 보면 장애가 생기거든요. 장애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왜 장애가 생길까. 그 장애라는 것을 조금 덜어내기 위해서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거거든요. 자비도량참법은 더 쉬운 말로 하면 “내 삶에서 장애 덜어내기”입니다. 쉬운 말로 “장애 지우기”, 이렇게 표현해도 되겠죠.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장애가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장애란 걸림이란 건데, 내가 얼마 전 읽었던 책 중에 재미난 비유가 하나 있더라고요. 어떤 나무꾼이 땔감이 다 돼서 땔감을 구하려고 산을 갔대요. 그래서 봄이 이제 오니까 겨울에 쓰러진 나무도 있고, 잔가지도 많고 그러니까 이것저것 나무를 다 베어서 단을 묶어서 끌고 내려오는데, 여기에 걸리고 저 가지에 걸리고 저 나무에 걸리고 하는 거예요. 왜 걸리겠어요? 맘껏 품에 한 아름 안고 내려오니까 걸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어느 수행자가 지켜보고 있다가, “왜 이렇게 진땀을 흘리면서 고생을 하나?” 하면서 나무꾼한테 “가지치기를 해라. 그러면 이 나무를 가지고 내려가는데 크게 어렵지 않을 테니 가지치기를 하고 내려가라.”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나무꾼이 돌아보니까 나뭇가지가 많아가지고 여기저기 걸려 있는 거예요. 근데 보니까 그 나뭇가지도 부러질뿐더러, 억지로 힘으로 끌고 내려오니까 나무 잔가지도 다 훼손될뿐더러 잘 자라고 있는 나무도 다 생채기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수행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뭇가지를 다 정리해 가지고, 굵은 것 토막을 내서 정리해서 내려오니까 아주 수월하게 내려왔다는 그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우리가 절에 오면 늘 힘들다고 얘길 해요. 편해서, 축하할 일로, 기쁜 일로 절에 오는 것보다는 힘들어서 많이 와요. ‘왜 힘든가’ 얘길 들어보면, 그 나무꾼이에요. 이생에 와서 열심히 산다는 게 그 나무꾼이 좋은 땔감을 구하려고 이것저것 품 안에 끌어안은 것처럼 끌어안고 있어요. 그러니 내려가면서 -인생은 내리막길이니까- 내려가면서 힘든 거예요. 힘든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생채기를 내요. 그렇게 삶을 살고 있거든요. ‘이제는 마음을 가지치기를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게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얻어지는 거예요. 저도 소싯적에는 늘 자비도량참법을 했어요. 1년을 열어가면서, 열 때는. 근데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하고 나면 확실히 덜어집니다. 마음이 정리가 돼요. 봄이 되면 새싹들이 다 올라오지요. 그러면 과수농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아세요? 과수 농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지치기입니다. 웃자란 가지나 겨울 묵은 가지를 다 잘라요. 그래서 처음에는 볼품이 없어요. 나무가 앙상해지죠. 근데 왜 가지치기를 하느냐. 좀 더 좋은 과실을 얻기 위해서예요. 또 농번기가 되면, 4월이 되면, 한 달 뒤 정도 되면, 3월 말이나 4월 초가 되면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쟁기질을 합니다. 여기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다 경험하셨을 거예요. 갈아엎어요. 밭도 갈아엎고 논도 갈아엎고. 왜 갈아엎어요? 풍년을 기약하기 위해서. 갈아엎어야 땅 힘이 좋아지거든요. 자비도량참법기도라는 것은 내 마음의 잔가지를 치는 것이고, 좋은 과실을 얻기 위한 잔가지를 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풍년을 기약하기 위해서 마음을 갈아엎는 시도가 자비도량참법기도입니다. 농부가 가지를 치지 않고, 논을 갈아엎지 않고 맛 좋은 과실과 풍년을 기약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정초에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하면서 잔가지도 칠뿐더러 용기 있는 분들은 마음밭을 확 갈아엎어 버려요. 열장으로 되어있는 자비도량참법이 앞의 1,2,3장은 가지치기라고 보면, 6,7,8장은 다 갈아엎는 거예요. 그러면 9,10장 회향이 나오죠. 내가 느끼는 육근에 대한 것, 인식에 대한 것, 전생에 대한 것, 현생에 대한 것, 다 갈아엎는 거예요, 자비도량참법이란. 갈아엎는데 왜 갈아엎느냐. 왜 잔가지를 치고, 왜 내 마음을 갈아엎어야 되느냐. 왜냐하면 내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에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는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부인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이웃을 위해서, 더 광의적으론 그렇게 하는 거지만, 가장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거예요. 자비도량참법은 자비도량을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 건립하겠어요? 내 마음. 우리 마음 도량에, 우리 마음 정원이라고 그러잖아요? 마음정원 그러는데, 마음 정원을 다른 말로 하면 도량이잖아요. 내 마음에다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거예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아만심(我慢心)이나 그런 걸로 자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를 사랑하게 돼요. 우리는 진짜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거든요. 안으로는 나를 생각할 때, 아까 믿음 얘기했습니다마는, 안으로는 우리는, 제가 늘 법문 때마다 얘기하는 것 중에 법의 생명이란 말을 많이 하거든요, 법의 생명. 법의 생명을 새롭게 부처님을 만나면서 법의 생명이 태어났다. 법장(法藏)이라고 해요. 우리는 안에 법장, 법의 생명이 있어요.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분들이 안에 법장이 있어요. 법을 간직하고 있다는 거예요, 법. 그래서 우리가 천수경할 때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도 하지 않습니까. 그 법장을 다른 말로 하면 여래장(如來藏)이거든요. 여래를 우리가 간직하고 있어요. 여래의 성품을. 그래서 진관사에서도 <당신은 부처님입니다.>이렇게 얘기하죠. 여러분은 법장, 법의 존재고, 여래장, 여래의 존재다. 우리말로 하면 <본래 붓다>다. 여러분은 본래 붓다예요. 안으로는 이미 간직, 가지고 있는 거죠. 바깥으로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여러분은 정말 특별한 존재예요. 각별한 존재.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안으로 밖으로 이렇게 생각을 안 하고 삽니다. 이미 나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예요. 근데 그걸 자꾸 확인하려고 해요. 받아내려고 하죠. 그래서 어떤 노래, 이웃 종교의 노래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도 있어요. 그건 우리 불교 노래 아니거든요. 그 노래에서 사랑받기 위해, 우리는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이전에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런데 그걸 확인하지 못하니까 누군가에게 확인받기를 원해요. 사랑받기를 원해요. 안되면 어떻게 얘기해요? 변했다고 하고, 짜증 내고 그러는 거예요. 남편한테, 부인한테,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자식한테도 이미 나는 특별한 존재이거든요. 근데 이걸 확인을 하니까 멀어지는 거예요. 이제는 받으려 하지 말자. 내가 이미 특별한 존재이고, 이미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임을 믿고 나 스스로가 확인하고 느끼자. 진관사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분들, 초파일에 한 번 오는 신도들, 정초에 한 번 오는 신도들. 진관사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신도들은 진관사에 특별한 신도들이잖아요. VIP잖아요. 아니 VVIP. 여러분이 왔을 때 부처님이 싫다고 합니까, 짜증을 냅니까, 인상을 씁니까. 또 오면 스님들이 많이 계시니까 인연된 모든 분들이 다 차를 드리든지, 선물을 드리든지, 안되면 공양간에서 밥 한 끼라도 대접을 하잖아요. 여러분이 이미 진관사의 VIP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특별한 존재라는 것. <안으로는 본래 붓다이며 또 밖으로는 특별한 존재다.>라는 것을 알아가는 게 자비도량참법이에요. 자비도량참법은 말 그대로 참회하는 거잖아요. 참회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것으로써 내가 그러한 붓다의 존재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지, ‘내가 참회합니다.’라는 것으로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란 거예요. 참회를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건 이웃 종교에 가깝지, 우리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참회는 ‘잘못했습니다.’ 인정하면서 그 중생의 때를 하나씩 벗겨가면서 드러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본래 붓다라는 거죠. 그리고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 그게 불교의 원래 참회의 의미에요. 우리는 하면 할수록,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할수록 더 영롱하게, 더 찬란하게 자기 자신이 빛나겠죠. 자비도량참법에는 그런 힘이 있거든요.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저는 하나 더 얹어서 부탁을 드린다면, 건강해야 돼요. 건강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오래 얼굴 보면서 건강하게 사는 게 제일 복 많은 거예요. 요즘에는 그렇지 못해요. 오래는 사는 데 병들이 많아요. 다병시대에요. 제가 여기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건강관리를 잘하셔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 현상적인 거에 매여서 안으로 쌓는 것만 하다 보니까 건강들이 급격하게 나빠져요. 요즘 30대에 심장정지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30대 심정지로 제가 49재를 세 건을 지냈습니다. 30대. 30대 때는 진짜 건강할 때잖아요. 뭔가 의욕을 갖고 열심히 뭔가를 해낼 때 요즘 사람들이 비실거려요. 왜 그러느냐.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건강하지 못 하느냐 하면, 장이 안 좋아. 그리고 머리가 안 좋아. 뇌가 안 좋아요. 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거든요. 장청뇌청(腸淸腦淸)이란 말이 있더라고요. 뇌과학이란 책을 읽다 보니까 장이 청정해야 뇌가 청정하다고 해요. 잘 비워야 뇌가 청정해지는데, 뇌가 청정해지는 거 자체가 요즘 기억력 상실이나 우울증이나 치매가 빨리 오잖아요. 그게 좀 늦게 오게 하려면 뭘 해야 하냐면 유산소운동을 하라고 해요. 걷는 것, 많이 걷는 것. 오늘도 보니까 등산가는 분이 많던데 잘 걸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등산 갔다 내려와서 막걸리에 파전에, 나아가 2차 3차 이렇게 가버리면 안 걷느니만 못한 거예요. 잘 걷고 청정하게 쉬어야 합니다. 근데 운동하라니까 산에 간다고 그래. 지금 이야기 듣는 사람들 중에 양심에 찔리는 사람 많을 거예요. 산에 올라간다 해놓고 잘 가요. 잘 올라갔다 내려와서 땀을 쫙 빼고 몸이 청정해졌어요. 맑아졌어요. 기운이 돌아가. 기운이 돌아가 좀 살만하니까, 맑아지니까 그다음에 막걸리를 마셔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이게 계속 반복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진짜 운동을 하라는 거예요. 근데 그 운동 중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 유산소 운동 중 제일 좋은 게 뭐예요? 절이에요. 절 하는 거. 근데 자비도량참법에는 절이 굉장히 많죠. 1,080배를 하는 거잖아요. 각 장마다 지심정례하면서 부처님 명호를 부르잖아요. 그게 부처님 명호 밑에 3번, 7번, 21번 이렇게 되어있잖아요. 절을 하잖아요. 그게 제일 좋은 유산소 운동입니다. 그렇게 자비도량참법처럼 절을 하게 되면 유산소운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 장이 청정해지죠. 장이 청정해지면 어떻게 되냐 하면 뇌가 청정해져요. 우리 기억을 관장하는 게 뇌에 해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기억력은 연결해 주는 거거든요. 근데 여기서 아픈 곳에 치유하는 줄기세포를 만들어내요. 그래서 절을 많이 하고 몸이 건강해지면 자기치유력이 생기는 거예요. 물론 관절이 안 좋으신 분들에게 억지로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정말로 관절이 안 좋은 분들은 의사에게 가야 되고 약사에게 약을 처방해 드셔야 합니다. 근데 스님이 얘기했다고 죽어라 해 가지고 그나마 있는 관절도 망가져 버리면 그건 책임을 질 수가 없어요. 보험도 안 돼요. 그러니까 무릎이 안 좋은 분들은 앉으신 상태에서 지심 정례만 하면 됩니다. 건강까지 하나 더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본래 붓다라는 게 있고, 또 하나는 나는 특별한 존재야, 해서 건강을 잘 챙기는, 그게 자비도량참법을 잘 하게 되면 종합적으로 얻어지는 세트예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알게 모르게 자기가 취득되는 건데, 그래도 자꾸 어려움이 생겨요. 장애가 생겨, 힘들어. 왜 힘드냐하면 다른 게 없어요. 딱 3가지에요. 하나는 남들과 비교를 해요. 비교를 하다 보니까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빠지거든요. 우리가 얼마나 비교를 많이 하고 사느냐. 물론 그 비교라는 거 자체를 통해서 문화가 발전하기도 하고, 어떤 집단이나 단체가 성장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그 비교를 꼭 나보다 난 사람들에게 하잖아요. 특히 자녀들에게 이 비교를 많이 합니다. “누구는 어떻던데.” 이거 하지 말아야 해요. 비교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힘들어 하고, 우월감에 빠져 자기가 조금 가졌다고, 조금 낫다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상처를 주고 하는 것들이 비교 때문에, 잘못된 비교 때문에. 두 번째 우리가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과 걱정이에요. 사실은 우리가 삶에서 그 불안 때문에, 신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건데, 정말 용기 있게 뭔가를 할 때 주저주저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가 지나간 과거로 인한 후회잖아요. 후회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고 하는 건데, 결국은 이 세 가지, 비교하지 않기, 또 후회하지 않기, 걱정하지 않기, 이 세 가지만 잘 관리해도 삶이 굉장히 편안해질 수 있어요.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또 이런 비교로 인해 가지고 자기 삶을 자꾸 갉아 먹어요. 그래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제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게 자기 자신인 줄 몰라요. 그러한 마음들을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생깁니다. 정말로 생겨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그 공덕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알게 모르게 물들었던 그런 마음들을 잘라내고 갈아엎고 하는 힘이 생기게 된다라는 겁니다.. 그런 삶 자체가 보살의 삶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 보살을 그냥 보살이 아니라 불교식으로 말하면 시민보살이에요. 많이 들어보셨어요? 서울시민이시잖아요. 시민. 서울시민인데 이제 내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함께 그 마음을 나누고 살아가는 사람을 시민보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비도량참법을 죽 하면, 열심히 하면 본래 붓다인 것을 확인해서 시민보살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자비도량참법의 힘이다’라는 거예요. <난 본래 붓다이며 시민 보살이다.><나는 본래 붓다이며 시민보살로 살아가겠습니다.>고 하는 게 자비도량참법의 공덕이다. 아무쪼록 진관사에 오시는 모든 사부대중, 남녀노소, 또 우바새, 우바이들이 진관사와 함께, 진관사 부처님과 함께 늘 행복하고 건강한 그러한 불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올리면서 오늘 법문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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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2월 14일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계호 주지스님 2021-02-14
<새해에는 부단히 정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안녕하세요. 코로나19로 인해서 여러분들을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방송으로 뵙고 있습니다. 또 몇몇 신도회 간부들, 밖에 계시는 몇몇 거사님, 보살님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올해는 근면함과 우직함을 상징하는 흰 소의 해입니다. 흰 소는 굉장히 신성한 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네 번의 설을 맞이했습니다. 동지에 작은 설, 음양의 양력 1월 1일을 맞이했고, 24절기의 입춘 새해를 맞이했고, 엊그제 마지막 음력 4번째 설입니다.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정월 초하루인데도 얼마나 따뜻한지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갔어요. 코로나19로 인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오다 보니까 날씨도 이렇게 변하게 됐습니다. 따뜻한 게 좋긴 한데, 우리가 보통 <새해는 질어야 좋고 보름에는 밝아야 좋다.>고 했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눈이 이불처럼 곡식들을 덮어주는 그런 모습이어야 되고, 또 보름날에는 밝고 둥근 보름달이 떠야 밝다고 합니다. 그런데 질지도 않지만 날씨가 따뜻하니까 우선은 푸근한 마음이 들지요. 신축년 새해는 육십갑자(六十甲子)중 38번째 되는 흰 소에 해당하는, 천간 '신'(辛, 금(金)이에요. 금은 흰색이거든요.)과 소에 해당하는 지지 '축'이 만나 신성한 흰 소띠의 해입니다. 소 해도 정축생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올해는 신성한 것을 중시해서 우리들도 조심조심해서, 새해에는 위기를 의연하고 슬기롭게 잘 극복해서 잘 이겨나가면 굉장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되겠지요?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습니다. 소에 관한 설화를 잠깐 말씀드릴게요. 충남 공주 갑사를 오다 보면 소의 공을 칭송하기 위해서 삼층석탑, 공우탑(功牛塔)이라는 게 있어요. 공우탑에 얽힌 사연은,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불을 지르고 절을 태우고 문화유산을 다 박살을 내고 갔어요. -우리도 수륙사터가 저기 9층석탑 있는 곳에 있었는데, 임란 때 다 불탔습니다. - 그래서 스님들이 중창불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중에 한 명 인호스님이 어디선가 절 밖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래요. 보니까 소의 고삐가 나무에 얽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고삐를 잘라 소를 구하고 소를 보내고, 가던 길을 재촉해서 자기도 갔어요. 그래서 7년간 탁발을 해서 대웅전 불사를 시작하는데, 불사를 시작하면 뭐가 제일 모자라겠어요? 보시금이 모자라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소 한 마리가 절 안으로 들어와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제가 불사를 잘 도와드리겠다.”라고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잠에서 깬 인호스님이 곰곰 생각해보니 7년 전 고삐에 얽힌 소를 구해준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문밖에 나갔더니 소가 있었어요. 소가 스님을 쳐다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3일 후에 서까래, 기둥 등 재료들을 마차에 싣고 와서 중창불사를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법당 마루에 목재를 까는 마무리 작업이 남아서 스님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백두산과 울릉도로 불사금을 모으기 위해서 만행을 떠났어요. 그런데 다행히 목재는 구했지만, 운반이 또 걱정이잖아요. 스님들이 힘이 약하니까. 그런데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가 와서, 백두산에 이어서 바다를 헤엄쳐 오가면서 향나무를 운반해 주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그 소는 기력이 다해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는데 법당불사가 완공되던 해에 소가 숨을 거뒀어요. 그래서 정말 이 소를 기리기 위해서 공우탑이라고 해서 3층 석탑을 만들었습니다.소가 이렇게 근면하고 이렇게 보시를 잘해서 스님들에게 은혜에 보답하는 설화도 있고. 또 법화경에 보면 ‘삼승(성문·연각·보살)’의 대백우거(大白牛車)가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거든요. 흰 소의 소를 상징적으로 일불승에 비유했고. 또 선가(禪家)에서는 마음자리를 비유한 심우도(尋牛圖)가 있습니다. 심우도, 목우도(牧牛圖)라고 합니다. 소를 우리의 마음자리에 비유해서 소를 찾아서 깨달음에 비유한 것이 있는데, 심우도를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는데 법당의 벽화에 보면 거의 다 그려져 있어요. 한번 찾아보세요. 첫째는 심우(尋牛)라고 해서,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소의 자취를 찾는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는 견적(見跡)이라고 해서, 소를 찾을 실마리가 되는 발자국을 본 것입니다. 그 다음, 견우(見牛), 득우(得牛), 목우(牧牛), 기우귀가(騎牛歸家), 망우존인(忘牛存人), 인우구망(人牛俱忘), 반본환원(返本還源), 입전수수(入纏垂手) 등 깨달음의 상태를 표현한 10가지 그림이 있습니다. 마지막의 결론은 표주박 차고 거리에 들어 집집마다 다니며 더불어 사는 성불의 내용인데요. 우리가 이렇게 위기를 잘 극복하고 살아가면서, 호시우보(虎視牛步)란 말 들어보셨어요? 호랑이 눈처럼 살피고, 이건 지혜를 상징하는 거고, 소처럼 뚜벅뚜벅 행동으로 실천하는 호시우보의 한 해가 되어야겠지요.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는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간과 정성을 잘 들여 공을 기울여 올 한해는 뚜벅뚜벅 걸을 수 있는 소의 근면의 정신을 배우면서 차곡차곡 정리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축년 새해 제 발원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깊고 넓은 자비심으로무량한 공덕이 증장하며얼굴엔 미소가 깃들고,몸에선 친절과 행복의 향기가 나며 나를 편(便)하게,서로를 귀(貴)하게,모두를 행복하게, 아는 것을 넘어 새로움으로새로움에서 다시 따뜻함으로이어지기를 기원(祈願)드립니다. 올해는 나를 편하게 하면서, 나를 막 닦달하거나 하면 본인이 안 편하죠. 항상 나를 편하게 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일이 있어야 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그래야지만 나도 행복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설은 <설다, 새롭다>라는 의미인데, 새해에는 우리는 항상 서원을 하지요. “올해는 공부를 다시 해야 되겠다. 독서를 해야 되겠다. 올해는 산행을 해야 되겠다. 운동을 해야 되겠다.” 하지만 어떤 때는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원을 잘 세워 좋은 일로서 경전독송도 좋고 독서도 좋고. 그래서 키케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노인의 즐거움이 되며, 위급하고 어려울 때 도피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새 밖에 코로나19로 인해서 어려운 때에 자꾸 나가서 나대려고 하지 말고, 안으로 마음을 식히면서 우리들의 양식이 되고, 보배가 될 수 있는 책을 읽으면서, 경전을 독송하면서, 법화경을 독송해도 되고, 관음경을 독송해도 되고, 반야심경을 외워도 되고, 원을 세워, 뭔가 큰 원부터 세우지 마시고 조그만 원이라도 할 수 있는 원을 세우시면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이 되죠. 올해는 소의 모습처럼 근면하고 뚜벅뚜벅 천천히 가면서 실천하는 보현행자가 돼야 하고, 또 호랑이 눈, 지혜의 안목을 가지고서 판단력이 있어야 되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판단력이 우선이거든요. 그래서 정견(正見)이라는 게 팔정도 가운데 제일 먼저 있는 게 판단력이 좋아야 된다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항상남을 위하고, 나보다 남을 위하는 이타의 정신을 살면 올해도 좋은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